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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60분

안즈 전력 60분 : 우정

by 망각. 2016. 7. 30.

, , .”

양손은 무릎 위에 놓고 허리는 반쯤 숙인 채로 숨을 몰아쉬던 나는 틈틈이 주변을 살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붉은색의 하늘과 땅밖에 없는 죽음의 땅, 침식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이 서있었다. 그러나 나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즈.”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일순 소름이 돋아 재빨리 몸을 돌리면서 뒤로 빠졌다. 앞에는 붉은 무언가가 연기처럼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갔고, 그곳에서 나는 나와 똑닮은, 그러나 다른 누군가를 맞이했다.

왜 그렇게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거야?”

그야 당연히.”

지금의 네게는 친구가 있으니까?”

!”

여전히 키득키득 웃으며 그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마치 연기처럼, 또는 귀신처럼 내 몸을 감싸며 올라와 내 등 뒤에 섰다. 어깨에 올라오는 손이 뱀의 비늘처럼 차가웠고,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말조차 뱀의 혓바닥 같아 소름이 끼쳐왔다.

그 녀석들이 있으면 뭐가 해결될 거 같아? 아아-, 불쌍한 안즈. 헛된 희망에 빠져버린 안즈. 너는 영원히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영원히.”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어째선지 몸과 더불어 혀까지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그가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와서 양손으로 내 얼굴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봐. 그놈들은 어디 있지? 지금 네 옆에 있는 건 누구지? 이런 상황에서도 과연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아니야. 네 말이 틀려.’

머릿속에서는 바로 대답이 나왔는데, 굳어버린 입은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앞에 있는 그는 싱긋 웃으며 뱀처럼 계속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놈들은 널 구제하지 못해. 아니, 오히려 널 불행하게 만들 거야. 어쩌면 그놈들이 널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반대라면 몰라도 그렇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넌 나한테 꼭 필요한 존재니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마지막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음과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붉디붉은 침식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내 앞에는 어두운 기숙사의 천장이 나타났다. 나는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신 숨을 헐떡이면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

나는 현실감각을 되찾지 못하고 연신 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몇 차례의 반복 끝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자각하자 그제야 들리지 않던 주위의 소리가 들려왔다.

렌의 코고는 소리, 미림이가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 창문 밖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바람소리. 그 모든 소리들은 꿈 때문에 요란히 뛰던 내 심박수를 진정시켜줬다. 나는 조심히 침대 밖으로 나와서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세안대로 떨어지는 물줄기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천천히 옷의 소매부분을 당긴 다음 세수를 했다. 그것을 몇 차례 반복한 나는 세안대의 꼭지를 잠그고 근처에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손목부근을 수건으로 닦던 나는 그곳에 나있는 상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때? 그 때가 떠오르지 않아?”

또 다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깔려있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렸다. 나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 솔직히 그 때가 편했잖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목숨만 생각하면 됐던 때가.”

귀를 막았건만 어째선지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 때가 편하다고 생각한 적 따위!”

땅을 향해 있던 내 시야로 검은색 연기가 스르륵 올라왔다. 그것은 내 몸을 감싸 안았고 그것이 내 귓가에 닿을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며 온갖 절망적인 미래를 속삭였다. 나는 이제는 시야를 가리는 검은색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 이름 부르지 마.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완전히 어둠에게 시야가 먹혀버렸다고 생각되는 그 때,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사라졌다. 내가 무슨 일인지 몰라 정신을 놓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강제적으로 올려 진 내 시야로 들어온 것은 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렌과 미림이었다.

, 안즈! 너 왜 그래? 괜찮아?”

안즈 씨, 무슨 일 있었어요?”

동시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는 그들을 보면서도 나는 얼떨떨한 기분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있던 렌은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매를 닦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눈물까지 흘리고 있어?”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한 채로 시선만 돌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에워쌌던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렌이 잡아당기는 탓에 귀에서 손이 떨어졌는데도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내며 렌의 옷의 얼굴을 파묻었다. 입에서는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 , 진짜 왜 그래?”

렌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렌의 옷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울음을 쏟아냈다. 결국 어정쩡하게 있던 렌의 팔이 내 등을 감싸 안았고, 뒤이어 옆에 무릎 꿇은 미림이도 나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시원하게 우세요, 안즈 씨.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요.”

어째선지 그 말에 너무 가슴이 따듯해져서 나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에, 그리고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너무도 큰 안도감이 몰려왔다. 단지 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