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다. 외롭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고 싶다.
메이플 월드에서는 흔치 않은 비를 맞은 채로 남자는 목적지 없는 걸음을 옮겼다. 눈 아래로 흐르는 것이 비인지, 눈물인지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남자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받고, 또 상처받은 끝에 이제는 살 의욕까지 남아있지 않은 그런 표정에 보고 있는 사람마저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았지만, 아쉽게도 비를 피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자의 표정을 살피고, 그를 위로해줄 사람 따위는 없었다.
한참을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결국 마을을 벗어나 몬스터가 출현하는 영역까지 나왔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몬스터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자는 초점이라곤 없는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파쇄철조.”
남자의 손에서 나온 보랏빛이 곧 낫을 든 정령의 형태로 변했고 그 정령은 주변에 몰려든 몬스터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단 한 번의 기술로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전멸하자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몬스터들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려 달아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남자, 은월은 주변에 시체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에 일 때문인지 아무리 걸어도 남자를 덮쳐오는 몬스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털썩.
갈 길 없는 걸음은 결국 도중에 어느 나무 아래에 걸터앉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은월은 몰랐지만 그가 기댄 것은 주변에 있는 나무들 중 유일하게 죽어있는 나무로, 그 탓에 황량한 나뭇가지만 남아 은월의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주지 못했다.
하지만 은월은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비를 맞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심정으로는 비가 자신의 뒤숭숭한 마음을 씻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는 그러지 않았다. 비는 그저 은월의 몸을 적셔 체온을 뺏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은월의 초점 없는 눈이 하늘로 향해있을 때, 갑자기 그 앞으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수상해보이고, 사악해 보이는 연기는 곧 한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 형체는 은월을 내려다보았고 곧 형체로부터 무겁고 탁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과연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물었었지.』
“….”
『지금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군. 과연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겠나?』
눈앞에 검은 마법사가 나타났음에도 은월은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은월의 마음에 너무도 큰 상처가 새겨져있었다. 은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란은 모든 기억을 잃었고, 팬텀은 나한테 누구냐며 공격을 해왔고, 루미너스는 나 같은 친구는 둔 적이 없다며 경계했어. 메르세데스는 자신의 마을을 찾아온 손님으로서 나를 반겼지만 반드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던 친구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몰랐지. 아프리엔은 만나지도 못했고, 그의 계약자인 프리드는 이미 죽었어. 내 선택의 결과가 이거라면….”
은월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검은 마법사가 말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건 지금의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너에게 제안할 게 한 가지 남았지.』
“…?”
『네 친구들에게 기억을 상기시켜줄 수 있다.』
“…!”
『어때? 꽤 구미가 당기지 않나?』
검은 마법사가 은월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앉아있던 은월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친구들이 나를 떠올릴 수 있어.
그 마음 하나로 은월의 손과 검은 마법사의 손이 닿았다. 곧 주변으로 검은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명하군. 은월.』
밤하늘을 수놓은듯한 별빛이 내리쬐는 시간의 신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를 나뉘어 움직였다. 주가 되는 영웅들을 빼고는 모두 몰려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흩어졌고, 영웅들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마치 옛날 같은 걸?”
“감상에나 빠질 때가 아니다, 좀도둑.”
“그 정도쯤은 나도 알고 있어, 샌님. 하지만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물론 당시와는 많은 게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야.”
“팬텀 말이 맞아. 애초에 그 때는 우리들끼리 조를 나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꺼번에 움직인 적은 없었잖아.”
메르세데스가 대꾸하자 루미너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 숫자도 한 명 줄었으니.”
“무슨 소리야, 샌님? 비록 프리드랑 아프리엔이 없긴 하지만 그 자리를 꼬맹이하고 미르가 채우고 있잖아? 한 명이 줄어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멈칫.
팬텀의 의아한 물음에 루미너스가 갑자기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 일행들도 모두 달리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성질 급한 메르세데스가 그를 재촉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뭐하는 거야, 루미너스!”
“잠시만….”
루미너스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입에서는 그의 생각이 곧이곧대로 흘러나왔다.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이야?”
“분명 내 기억으로는 우리는 총 여섯 명이었는데….”
“아, 글쎄. 아프리엔까지 합치면 여섯이 맞잖아. 그러니까….”
팬텀이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소리를 자르며 루미너스가 대답했다.
“그 말이 아니다, 좀도둑. 사람이 여섯 명이었다는 소리야.”
“뭐?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샌님. 우리는 분명….”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하던 팬텀이 곧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무언가를 깨달은듯했다. 루미너스가 말한 후부터 줄곧 고심하던 메르세데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답을 추론하던 루미너스의 뇌로 한 가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다시 보자는 말은 못하겠다. 이런 경험, 두 번으로 족해. 그래도 네가 좋아보여서 다행이다. 내가 기억하는 네 마지막 모습보다는 행복해 보이니까.’
“은월…! 그러고 보니 요새 은월을 본 사람이 있나?”
루미너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이어 팬텀과 메르세데스도 연달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이해를 못하는 표정을 짓는 것은 기억이 없는 아란과,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에반뿐이었다. 메르세데스가 양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요새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지? 분명히 맞지? 은월이….”
메르세데스와 같은 표정을 지은 팬텀과 루미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 루미너스가 메르세데스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기억났어. 봉인 마법! 그 마법이 발동되려면 누군가 한 명이 희생했어야 됐어. 그 때 희생했던 게 은월이었다. 설마 희생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 것일 줄은 몰랐는데….”
“제길! 그렇게 된 거였나.”
“잠시만. 그러면 이 기억은 영영 떠오를 수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이 기억이 떠오른 거지?”
“검은 마법사 덕분이지.”
그곳에 있는 모두가 갑자기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대답은 그들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지금까지 누가 다가온다는 기척을 느끼지 못 한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은 신전의 기둥 위로, 어두운 탓에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몸이 먼저 나가는 아란이 그를 향해 도약하며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아란, 잠시만요! 이 목소리는 분명…!”
콰앙!
에반이 만류했지만 아란의 폴암은 이미 남자를 향해 휘둘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남자의 잔상은 아란이 다가오기도 전에 사라졌고, 애꿎은 기둥만이 부서져 내렸다. 아란이 다시 땅에 착지했을 때, 마찬가지로 그들과는 살짝 떨어진 위치로 누군가가 착지했다. 누가 보더라도 방금 전에 그 남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들의 눈에는 놀람과 불신이 가득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백발과 야수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핏빛의 눈동자를 가진 남성의 모습은 지독히도 그들이 생각하는 누구와 닮아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나 분위기만큼은 기억속의 그와는 정반대였던 탓이다.
“…은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에반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휘날리는 백발을 귀 뒤로 넘기면서 상대는 애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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