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샌님! 샌님! …루미너스!”
아아, 속 매스꺼워. 누가 이렇게 날 흔들어대는 거야. 몸은 또 왜 이렇게 아파.
나는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눈 하나 뜨는 것도 왠지 모르게 힘이 들었다.
‘기껏 떴는데 그마저도 흐린 건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
내 물음에 상대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상대는 내 얼굴을 부여잡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샌님, 샌님! 정신이 들어? 그런데 나 몰라보겠어?”
여전히 시야가 희뿌얬고, 상대의 목소리를 제대로 인지하기에는 내 몸이 너무나도 고단했다. 그런 탓에 나는 여전히 상대가 누구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그러자 상대는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뒷머리를 박박 긁는 모습이 뭔가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상대는 잠시간 나를 내려다보다가 한 마디 말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샌님,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봐. 정신 놓지 말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상대의 온몸을 타고 주황빛이 반짝거렸고, 얼마 안 가 상대는 사라졌다. 정신을 잃지말라고 말했지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사라지자 내 눈꺼풀은 다시 닫혔고,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정말 눈 한 번 깜빡이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될 때였다.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는 아까처럼 온 몸이 아프지도 않았고, 눈꺼풀도 나름대로 쉽게 열렸다. 무엇보다도 눈앞이 흐리지가 않았다.
“샌님, 정신이 들어?”
나는 내 앞에 있는 초록색의 빛기둥을 쳐다보다가, 빛기둥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목소리는….
‘팬텀?’
나는 팬텀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한 손을 들어 올려 내 목에 가져다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내가 팔을 움직인 것을 눈치 챘는지, 초록빛의 빛기둥이 점점 사라지더니 그 안에서 팬텀이 나타났다. 팬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내게 물었다.
“루미너스, 좀 괜찮아?”
끄덕.
나는 힘겹게 목을 끄덕여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팔을 들어 올릴 때부터 느꼈지만 온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팬텀은 내 목이 움직이는 것과, 손이 목을 향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재차 물어왔다.
“루미너스, 왜 그래? 혹시 목소리가 안 나와? 몸도 잘 안 움직이고?”
끄덕.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팬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 몸을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하다가 양 팔로 나를 들어올렸다.
‘너…, 뭐 하는!’
당황한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치려 했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팬텀은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어느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팬텀은 나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안. 지금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일단 나를 믿어줘, 루미너스.”
“…?”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야.
황당한 내가 물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고개를 젓자니 안긴 자세 때문에 그마저도 힘들었을 뿐더러,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팬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찾아보니까 저쪽에 오두막이 있더라고. 기술을 이용하면 마을까지 내려갈 수 있는데 아무래도 루미너스 네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 같아서 급하게 ‘힐’이라도 훔쳐서 왔어.
그래봐야 클레릭인데다가 힐의 레벨도 낮아서 별 도움은 안 된 거 같지만 하필 워낙 변두리라서 물약이 남아있는 게 없더라고.”
재잘재잘 얘기를 늘어놓는 팬텀을 보면서 나는 또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샌님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지금은 어째선지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그것을 발견한 팬텀이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기억을 잃었으면 나에 대해서 잘 모르겠구나. 나는 팬텀이야. 사람들의 기술을 훔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팬텀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화끈.
내 얼굴로 순식간에 피들이 몰려오면서 붉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안 나와서가 아니라, 너무도 당황스러워서 말을 하지 못했다.
‘저, 저 녀석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평소에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던 놈이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마치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럴 때 마침, 퍼뜩 내 머리로 하나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방금 전 (정확히는 방금 전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야가 흐려서 상대를 모르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상대가 팬텀이었다면….
‘제길! 오해를 해도 제대로 잘못했군!’
얼른 그게 아니라고. 기억을 잃지 않았다고. 그러니 평소대로 행동하라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몸의 이상으로 인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왠지 말하기가 싫어.’
분명히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은 사살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지도 않았고, 팬텀을 몰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이 상태로 있고 싶었다.
‘너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두근두근.
왠지 모르게 아까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퍼뜩 이렇게 기억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팬텀이 다시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사귀는 사이였어, 루미너스.”
헛소리. 아주 제대로 헛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그래, 어쩌면 당분간은 이런 것도 괜찮을 지도….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그렇게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너의 마음도, 그리고 나의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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