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금발을 가진 소년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떨리는 몸이나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에서 나는 그가 울고 있음을 직감했다. 난감한 심정이 목소리에 실려 나오지 않게 조심하며, 나는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에반….”
“왜 저는 안 돼요?”
소년의 목소리가 내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소년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제가 프리드를 닮았다면서요!”
“에반, 그러니까 그건….”
“제 외모가 프리드를 닮았다면서요! 제 눈빛이 그와 똑같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를 좋아하셨다면서요! 사랑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저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울컥해서 악으로 가득 찼던 목소리가, 마지막에는 다시 울음기를 머금은 상태로 돌아왔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대신해서 내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의 머리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으며 사과했다.
“에반, 미안해.”
“미안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미안.”
“그런 소리 듣기 싫다니까요!”
“그래도…, 미안.”
나는 그에게 이 말 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오닉스 드래곤의 계약자인 어린 소년은, 과거 내가 연모했던 이를 닮았지만 내게 있어서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프리드가 연모의 존재였다면, 에반은 내게 있어서 남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차마 거짓으로라도 그를 좋아한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에반의 손이 이제는 옷자락을 꽉 쥐다 못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닿아있는 옷의 가슴팍이 젖어갔다. 나는 떨리는 그의 몸을 토닥여주며 끝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미안. 미안. 미안해, 에반.
그 날 그런 일이 있은 이후부터 에반은 다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나와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며 지내는 모습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그가 나를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그 때처럼 되돌려줄 수 없는 마음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그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그렇게 자주 만나며 지내던 우리는 에반이 다시 모험을 떠나면서 장기간 떨어지게 되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서로 만나고 지냈을 수도 있겠지만 에반은 그대로 메이플 월드 전역을 돌아다녔고, 나는 사람들이 드나들기 힘든 곳으로 들어가 수련에 매진했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났고,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언제나처럼 수련을 하고 있던 내게로 연락이 온 것은 에반과 헤어진 시간이 2년하고 조금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에반에게서 헤네시스에 있는 어느 동산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나는 그에 응해 그가 가르쳐준 장소로 향했다. 도착하고 나서 깨달은 거지만 그 동산은 2년 전에 그가 내게 고백을 했던 바로 그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에반이 이미 나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동산 위에 유일한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에반을 기다렸고, 마침내 누군가가 동산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에반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정확히는 부르려 했다.
“에바…안?”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채로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이를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갈색빛이 감도는 금발과, 오닉스 드래곤의 상징이 박혀있는 기다란 로브를 입고 있는 청년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프…리드?”
나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프리드는 죽었어. 나는 고개를 젓던 것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에반임을 알아챘다.
“에반?”
“오랜만이에요, 은월.”
나는 미소 지으며 걸어오는 그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며 화를 내야할까. 아니면 도대체 왜 이러냐고 따져야할까. 아니면 프리드를 따라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슬퍼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지도 못했는데 에반이 내 코앞에 멈춰서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요, 은월? 반갑지 않아요?”
“아, 아니. 물론 반갑지. 그런데…, 그 모습은 뭐야, 에반?”
나는 앞에 있는 에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분명 2년 전까지만 해도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을 정도로 작았던 아이가 이제는 나보다 살짝 커져있었다. 에반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이 모습이요? 다른 영웅들한테 물어서 꾸며봤어요. 어때요? 좀 프리드 같아요?”
나는 그의 말에 아연실색하며 되물었다.
“설마 나 때문에…?”
에반이 싱긋 웃으며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턱을 잡아서 자신을 향해 고정시키며 속삭였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설마 그렇게 쉽게 포기할 줄 알았던 거예요?”
나는 점점 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일종의 구속 마법이었다. 자력으로 풀기에는 상당히 강했을 뿐만 아니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난 절대로 은월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내가 프리드의 모습을 따라하는 한이 있더라도요.”
그러니까 이제 은월은 내꺼에요.
에반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내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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