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보통 사람들은 눈이 내리면 반가워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쌓이면 위험하겠다느니, 길이 얼어붙을 거라느니 하면서 항상 볼멘소리를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
나는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눈의 무서움은 쌓이는 것도, 나중에 가면 녹아서 얼어붙는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의 진정한 무서움은 소리 없이 내린다는 것이다.
눈은 직접 보거나, 느끼지 않는 한 내리는지 알 수 없다. 마치 밤길을 달리는 암살자처럼 조용히 다가오는 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의 온기를 빼앗아간다. 온기를 가져갔으면서도 욕심 많은 눈은 바닥에 쌓여 사람들을 방해하고, 좌절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온기를 빼앗고, 바닥부터 점차 쌓이기 시작하는 눈은 가슴속에도 내렸다. 그것은 내가 알아채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쌓이고, 내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도 많이 쌓여서 치울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오고 만다. 그리고 그 때쯤에는 이미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들어와.”
끼익 비명을 지르며 열리는 문 사이로 기다란 흑발을 가지고, 핏빛마냥 붉은 눈을 가진 여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물었다.
“리, 리즈가 여기는 웬일이야?”
“레이안에게 이걸 전해주러 왔습니다.”
리즈는 내게 봉투를 한 개 내밀었다. 내심 기대감에 차있던 나는 그것을 보고 단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봉투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단번에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창가로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또 그 지긋지긋한 그놈의 파티야? 됐어. 안 가.”
리즈의 시선이 내 뒤통수로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끝까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리즈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상관이 없었나보다. 그녀는 나를 부르지도 않고 제 할 만만을 하고 떠나갔다.
“황태자로 책봉이 된 이상 태자께서는 참석하셔야합니다. 황제와 황후도 참석하는 자리니 편지에 적힌 장소와 시간에 맞춰 오십시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주먹이 쥐어져있던 손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이대로면 나는 켈른을 위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되면 안 됐다. 나는 책상으로 걸어가며 다짐했다.
‘꼭 날 보게 만들겠어.’
켈른을 지탱할 황제가 아닌, 레이안으로서 그녀에게 보일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책상 위에 있는 봉투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옷장으로 걸어가 필요한 옷들과 짐들을 챙겼다. 모든 짐을 챙긴 나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훅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차가움 따위 뚫고 지나가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밖으로 짐을 던진 나는 그 뒤를 따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래에 있는 눈에 푸욱하고 빠졌지만, 덕분에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는, 그것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때만큼은 눈만큼도 내 안의 온기를 빼앗아가지 못했다. 아니, 이것은 온기가 아니었다. 눈 속에 피어나는 새싹이 속에 품은, 그런 열기가 내 몸에 가득했다. 그리고 눈은 이 열기를 빼앗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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