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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60분

안즈 전력 60분 : 책(柵)

by 망각. 2016. 5. 21.

붉게 물들어버린 침식의 땅, 그곳을 빠져나오려면 수많은 장애물들을 뚫어야했다. 침식에 살고 있는 흉포한 마물들, 시도 때도 없이 내 몸을 차지하려는 그 녀석, 그리고 내게 가장 잔인하게 다가왔던 울타리.

넌 뭐하는 녀석이야! 이곳으로 한 발짝만 다가와 봐!”

꾀죄죄한 갑옷을 입거나 옷가지를 걸친 사람들이 나를 경계했다. 항상 그랬다. 사람들은 나를 경멸어린 시선을 쳐다보았고, 나를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로 취급했다. 그래,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침식,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마물들을 보는듯한 눈빛으로 항상 나를 쳐다봤다.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피난을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경계했다. 전부 처음 보는 이들이었기에 내 능력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그저 혼자서 침식을 뚫고 지나왔다는 이유로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나를 말리려했지만 한 번 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사렸다. 나는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더 깊숙이 들어간 뒤, 그늘이 있는 곳에 내 모습을 숨겼다. 한 번 눈에 띄면 계속해서 관심이 집중되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그때까지 따라오던 시선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시선도 느끼지 못했을 때가 되고서야 피난민들로부터 눈을 돌려 앞에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부러진 나무들을 엮어 만든 일종의 울타리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국경이라고 불렀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지금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도착했다는 안도감의 표정일까. 봉쇄되어있는 국경에 대한 절망의 표정일까. 아니면 손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장애물에 대한 기쁨의 표정일까. 혼자서 살아 돌아왔다는 슬픔의 표정일까.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내 마음은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공허, 그 자체였다.

나랑 약속하나만 하자, 안즈.

언젠가 들었던 말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처음으로 나를 경계하지 않았던 사람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말이었다.

침식을 벗어나면 윈프레드로 가자. 그곳에서 내 가족을 만나고, 그곳을 졸업하면 널 바람의 기사로 만들어줄게.

그 때의 나는 어떻게 대답했더라. 그래. 좋아했던 거 같다. 바람의 기사가 되는 것은 내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걱정이 뒤따라왔다. 과연 세실의 가족이 나를 받아줄까 하는 고민이었다. 괜한 걱정이라며 그녀는 호언장담했다.

분명히 그 아이들도 널 좋아할 거야. 그러니까 약속해. 이곳을 나가면 윈프레드에 입학해서 졸업까지 마치겠다고.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이 침식을 나가고 윈프레드로 나가게 되면 안즈 네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길 거야. 널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 그 때쯤이면 넌 침식이라는 우리 안에서 빠져나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확실히 침식을 나가면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것들에 눈을 뜨면 지금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실. 내게는.’

덜그럭덜그럭.

과거의 사로잡혀있는데 어디선가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눈을 들어 앞을 올려다보니 천천히 나무 울타리가 양쪽으로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까지 발견한 나는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국경이, 열렸다.

 

나는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떼었다. 흰색으로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과 기둥들이 눈에 띄었다. 하늘은 침식처럼 빨갛지 않고, 푸른색으로 반짝였다. 그곳을 대리석만큼이나 하얀 구름이 바람을 타고 물고기마냥 헤엄쳤다.

그리고 그런 내 주변을 사람들이 오고갔다. 침식하고 다르게 주변은 시끄러웠다. 누군가는 급히 뛰어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함께 걸어가는 이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능력을 뽐내는 학생과 그 주변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내 옆을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흘끗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눈빛을 받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침식에서부터 낙인마냥 따라왔던 눈빛이, 지금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속으로 그 때 하지 못했던 대답을 속삭였다.

하지만 세실. 내게는, 이곳도 울타리에 지나지 않아.’

저주받은 나에게, 침식 밖은 전보다 더 큰 울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곳에 서있는 내게 자유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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