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루미 전력 100분 : 꿈
“샌님. 샌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청명한 하늘이었고, 그 다음에 눈에 띤 것은 익숙한 한 얼굴이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에, 사람을 매료시키는 보랏빛 눈동자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 닮아있었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냥 그였다. 거기까지 인지한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내가 상체를 들어 올리자 너는 얼른 몸을 뒤로 뺐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너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일어나자마자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야? 그렇게 내가 보기 싫은가 보지?”
너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는 분명….”
너는 분명 죽었잖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 나는 그제야 이곳이 낯선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여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 걸. 나도 일어나보니 여기였거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어느 동산 위였는데, 맹세코 나는 이런 동산을 봐 본 적이 없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수두룩하게 피어있는 동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지역 따위는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구나.
네가 있는 시점에서 알아챘어야 했다. 이건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볼 수도,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이런 동산에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잠에서 깨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와락.
“샌님?”
“…보고 싶었다.”
너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너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와, 세상에. 설마 샌님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역시 너는 모르는구나. 이것이 꿈인지. 현실에서 네가 어떻게 됐는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몰라도 돼. 아니, 그냥 알지 마. 그저 모르는 채로 내 곁에 있어 줘. 부탁이야.
“어라? 샌님, 울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디 봐봐!”
품에서 나를 놓으면서 내 얼굴을 보려는 너를 막기 위해 더 강하게 너를 끌어안으며 목이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 이렇게 안아 줘. 제발….”
너는 살짝 망설이는 듯싶다가 결국 다시 내 등을 토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만 있자 네가 입을 열었다.
“샌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싫은가?”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내 얼굴 볼 시간 별로 없을 텐데 보고 싶지 않아?”
“…!”
나는 얼른 너의 품에서 떨어지며 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는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내 눈이 안개가 낀 것처럼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알고 있었구나. 이것이 꿈이라는 것도, 현실에서 네가 어떻게 됐는지도, 내가 잠에서 깨면 이별이라는 것도….
“샌님, 울지 마.”
“….”
“울지 말라니까.”
“…좀도둑.”
“…왜?”
“…손 잡아줘.”
너의 손이 천천히 내 손을 감싼다. 꿈인 걸 아는데도 너의 손에는 온기가 담겨있었다. 그 손을 잡고 있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아줘.”
이번에도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줬다. 나는 눈에 다시 차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너를 꽉 안았다. 역시 따뜻하다. 분명히 꿈일 텐데 네 손도, 네 품 안도 모두 따뜻했다.
“…이제 그만 갈 때가 된 거 같아, 샌님.”
한참을 그렇게 안고만 있었는데, 너는 매정하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너의 품에서 떨어졌다. 아련한 미소를 짓는 네 얼굴이 보였다.
“…가야만 하는 건가.”
“아직 메이플 월드에는 샌님이 필요하니까.”
“….”
“작별인사야, 샌님.”
그러면서 너는 다시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잠시간 그렇게 안던 너는, 곧 자리에서 일어서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멀어지는 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팬텀.”
너는 걷다말고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좋아해.”
너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왔다.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는 듯이 웃으며 너는 대답했다.
“나도 그래, 루미너스.”
그것을 끝으로 나는 잠에서 깨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끝없는 동산과, 청명한 하늘은 사라지고 내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깼구나. 꿈에서 돌아왔구나. 그런데….
나는 한 쪽 팔로는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꿈에서 돌아왔는데…, 가슴이 시려왔다. 나는 꿈에서 했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좋아해, 팬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