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60분

안즈 전력 60분 : 바람

망각. 2016. 6. 11. 21:02

바람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머리칼을 헝클였다. 마치 쓰다듬어주는 듯한 감각에 나는 정말 간만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감각은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를 떠올리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 때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때, 그러면서도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힘든 건 덜했었다. 세실리아에게 검을 배우는 것이 힘들긴 했어도 충분히 재밌었고, 인정받고 싶다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들이 나를 아껴줄 때는 모든 피곤함과 고난이 다 날라가는 느낌이었다. 리치카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세실리아는 종종, 아니, 엄청 자주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었다.

그동안 받지 못했던 사랑을 그녀 혼자서 베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항상 사랑을 입에 담았고, 응어리 진 내 가슴을 쓸어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어색해 나는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 거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투덜거렸다.

머리 좀 그만 쓰다듬으면 안 돼?”

~ 네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면 기분 좋은데. 혹시 기분 나빠?”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다 큰 애 머리 쓰다듬는 게 좋아봤자 얼마나 좋다고.”

뒷말은 거의 내 귀에도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들었는지 세실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안즈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앤데. 당연히 기분이 엄청 좋지.”

역시나 가슴을 간질이면서 얼굴을 빨개지게 하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리치카와 세실리아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것이 또 기분이 좋았다.

그랬기에 행복했다. 지긋지긋한 침식 속에서 항상 마물과 마주치고, 힘든 검술 수련을 하면서도 행복해 미칠 거 같았다. 그리고 이 행복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고 조금, 아주 조금만 바랬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그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치카는 미쳐버린 채로 침식에서 빠져나갔고, 내가 몸을 잠식당한 사이 세실리아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기 직전 내게 넘겨준 편지와 그녀의 마지막 말을 침식 앞까지 찾아온 그녀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그 가족은 금방이라도 침식 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나는 그를 말렸다. 그러고는 결국 침식으로부터 몸을 돌리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 때를 떠올리자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나는 심장 부근을 움켜쥔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아 호흡을 골랐다.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다시 회상을 이어나갔다.

세실리아의 죽음은 나에게 절망을 가져오기엔 충분했다. 눈물샘이 다 말라버렸는지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고, 굳게 닫힌 입은 풀이라도 붙여 논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침식의 땅만큼이나 퀭한 눈동자는 앞서 가는 이의 발만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한 번, 딱 한 번 앞서가는 이의 등을 올려다 본적이 있다. 세실리아의 손길을 닮은 바람이 내 머리 위를 지나갔을 때였다.

가족이 되렴.’

세실리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을 때 나는 앞서가는 이, 엔디미온의 등을 올려다봤다.

또 다시 아주 살짝 바라고 말았다. 그를 형으로 부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그가 당장이라도 되돌아서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많이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면서 나를 위로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나도 그들의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원대해서 바라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을 정도의 바람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길을 걷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을 깨닫고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들이 돌아오길 바랐던 건 내가 아니라 세실리아. 그랬기에 그의 눈빛이 호의를 담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엔디미온, 그러니까 세실리아의 가족들은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도,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다. 아니,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가슴 한 구석에는 이런 바람이 남아있었고, 가끔씩 이런 그리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그것을 깨달아버린다.

세실리아의 말처럼 언젠가 가족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는 바람을.